전남대 임환모 교수
1. 들어가며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다채롭게 진행되고 있다. 남북한을 아우르는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굳이 3⋅1운동의 정신에서 찾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3⋅1운동을 재소환해서 재호명하는 것은 아마도 21세기 벽두부터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는 다층적인 주체의 연대운동이 3⋅1운동과 닮아 있다는 점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동학운동에 내재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변혁의 노력이 3⋅1운동으로 결실을 본 이후에 4⋅19와 5⋅18, 6월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점진적⋅누적적 성취’의 양상을 갖는 한국 근현대사의 역동성을 지속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변혁운동이 시대정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정치⋅경제⋅문화적 제도의 혁신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인류의 세계사적 프로젝트로서의 3⋅1운동이 갖는 정신성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를 탐색하고, 이러한 정신이 1920년대 한국 소설에서 어떻게 창조적으로 계승되고 있는가를 염상섭의 「만세전」과 현진건의 「고향」에서 확인하고, 나아가서 오늘날의 우리 소설문학이 실천해가야 할 방향성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자 한다.
2. 3⋅1운동의 정신 3⋅1운동은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두 달 동안 국내외에서 거국적으로 일어난 자주독립운동이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조선총독부의 집계에 따르더라도 100만 명이 넘고, 수백 명이 죽어나 다치고, 만여 명이 구속되었다.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사건’으로서의 3⋅1운동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을사늑약 이후 민족의 선각자들이 국내외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독립운동이 축적되어 민족적 잠재력이 3⋅1운동으로 분출된 것이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력이 국제연맹을 결성(1920)하려고 하면서 민족자결주의를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에 우리도 자주독립국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만세운동이 3⋅1운동인 것이다. 바로 그 직전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에서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과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조소앙 기초)는 한일합방조약이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임을 주장했고, 며칠 후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동경에서 ‘전조선청년독립단(대표 11인)’의 이름으로 ‘2⋅8독립선언서’(이광수 기초)를 발표하고, 여기에서 “吾族은 日本이나 或은 世界各國이 吾族에게 民族自決의 機會를 與하기를 要求하며 萬一 不然하면 吾族은 生存을 爲하야 自由行動을 取하야써 吾族의 獨立을 期成하기를 宣言”하였다. 무오독립선언서와 2⋅8독립선언서가 모두 “일본에 대하여 영원의 혈전”을 선언하여 무장투쟁이라도 불사할 것임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기미독립선언서’는 이미 우리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五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한 것이고, 행동강령에 해당하는 공약삼장에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는데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여금 어대ᄭᅡ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고 주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폭력 운동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3⋅1운동이 순수하게 비폭력 만세운동만은 아니다. 헌병, 경찰, 관리를 매개로 총독부의 폭력적 지배질서를 민중의 생활 일체에 관철시키려는 식민지 근대화 방식이었던 일제의 무단통치가 당시 조선인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민족 대표 33인(이중에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전국 방방곡곡과 외국에서까지 각계각층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특히 농민들의 참여는 민란의 성격을 띠었다. 배성준에 따르면 3⋅1운동은 처음에 ‘도시형-평화형’ 시위로 시작해서 점차 ‘농촌형-공세형’ 봉기로 변해가면서 ‘내란’을 방불케 하는 만세시위의 양상을 보였다.마치 1894년에 있었던 동학농민전쟁과 같은 현상이 다시 재현된 것이다. 천도교의 교주인 손병희가 주도하고 최남선이 선언문을 기초하여 만세시위가 촉발되었는데, 이들 민족 대표 33인은 당시 종교계 지식인들로서 무력투쟁이 아니라 오직 일제의 식민통치 ‘질서를 존중’하면서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정당한 의사’를 만세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3⋅1운동의 처음 시작은 민족자결주의를 매개로 외세에 기대어 자주독립을 성취하려는 데 그 의도와 목적이 있었다. 물론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에 맞추어 만세운동을 기획했다는 점에서 평화시위는 다분히 전략적일 수 있지만 기미독립선언서가 추구하는 바는 매우 타협적인 현실순응주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세 시위는 지식인 중심에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다층적 주체의 연대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렇다면 3⋅1운동의 정신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다층적 주체의 연대운동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의 개념이 형성되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민족은 존재해왔지만 그 개념이 생긴 것은 근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그가 인류학적 정신에 입각해서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라고 정의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비록 큰 민족이라도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그 경계가 한정적이다.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의 이미지나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개인은 어느 특정한 민족에 속한다는 상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8세기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리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의 개념은 1894년 동학혁명의 경험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의병운동으로 이어지다가 3⋅1운동에서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이 일상화되었을지라도 타민족의 압제와 침략에 대응하여 상상의 공동체인 수평적 동료의식으로서의 민족의식이 형성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다층적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민족적 주체로서의 상상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일제의 식민지 문명화와는 구별되는 민족적 주체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이른 것이다. 근대적 민족국가의 모태가 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1919. 4. 10.)될 수 있었던 것도 이 3⋅1운동의 정신이 만들어낸 민족의 정체성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3⋅1운동 이후에 한국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신문화’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어 일정하게 언로를 터주면서 조선인을 길들이는 순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1920년에는 한글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시사신문>이 창간되고, 월간 종합잡지 <저작권자 ⓒ 새화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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