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화순의병2

새화순신문 | 기사입력 2019/05/12 [17:40]

병자호란과 화순의병2

새화순신문 | 입력 : 2019/05/1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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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자호란과 호남의 충절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은 정묘호란 후 청나라와 화약이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대신들은 주화론과 주전론으로 양분되었는데, 점차 청나라가 요구하는 군신지례(君臣之禮)와 배상의 책임 전가는 주전론 쪽으로 기울어져만 갔다. 청 태종은 163612월 조선의 맹약 위배에 대한 문죄(問罪)를 묻는다는 명목으로 침략하여 14일에는 개성을 지나 서울 근교에 육박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침략에 대한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주화론자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 시간을 버는 한편, 두 왕자를 비롯한 비빈, 종실 및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신시켰다. 인조는 소현세자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전국에 교서를 내려 근왕병을 모집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주 공격지는 인조 및 대신들이 피난한 남한산성이었으므로 의병활동은 남한산성에서의 전투와 강화도에서의 전투가 대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치열한 항쟁으로 전투를 하고 가장 활발한 의병 활동을 보인 것은 호남 지방의 의병들이었다. 전라 병사 김준룡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관민은 인조의 근왕병 모집에 적극적으로 응하여 용인에서 청나라 적장을 살해하는 등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한편 거의 호소문을 도내 인사들에게 보내어 거병을 촉구하였다.

이에 강진의 김수권, 함평의 정대명, 광주의 허익복, 범진후 등이 호남 관·의병연합군을 편성하고 항전에 대비하여 의병과 군량을 동원하여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조의 교서가 도착하자 도내 관병을 소집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낙안, 광양, 구례, 곡성, 영광 등 도내 각지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었으며 병영의 군사까지 이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수원에 도착하여 광교산(용산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였는데 3천여 명의 작은 규모의 군대로서 10배가 넘는 청군을 격파하고 청의 백양골라(白洋骨羅) 등 적장과 수천의 오랑캐를 무찌르는 승전고를 울렸다. 그러나 약속된 감사의 후원군이 오지 않아 이들은 수원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전라도 관·의병연합군의 이같은 승리는 병자호란의 2대 승첩 중 하나로 기록될 정도로 큰 전과였다. 이때 근왕병으로서 호남 지방에서 올라가 이곳에서 활약한 의병장들로 대표적인 인물은 이호(李浩), 선정민(宣廷敏), 손대현(孫大鉉), 범진원(范振遠) 등 이었다.

한편 병사 김준룡(金俊龍)의 승첩 이후 전라도내의 각지에서 의병이 거병하였는데 이러한 의병 활동은 인조의 교서가 내려지자 더욱 활발해진 감이 있었다.

옥과 현감 이흥발과 대동 찰방 이기발 형제는 순창 현감 최온, 양만용, 류집 등과 함께 거의의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여산에서 결집하여 국난을 구제할 것을 외치고 광주의 류평, 나주의 김선, 나해봉 등과 함께 여산에서 모여 이미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그러나 청주에 이르렀을 때 인조가 청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통곡하며 돌아왔다.

화순에서는 진사 조수성과 그의 종질 조엽의 의병 활동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인조의 교서를 받고 즉시 격문을 보내어 광주유사에 고부립(高傅立), 박사원(朴思遠) , 나주유사에 류준(柳浚), 홍명기(洪命基) , 능주유사에 양우전(梁禹甸) , 남평유사에 서행(徐荇) , 순천유사에 김시약(金時若) , 동복유사에 정호민(丁好敏) 등을 각각 선정하였다. 그리고 화순읍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모병과 훈련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6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출전, 전주부를 거쳐 여산에 도착하여 이흥발, 이기발 형제의 의병과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전 장병이 여산에서 회맹하여 조수성(曺守誠)을 의병도대장으로 삼고 도절제사 이시방(李時昉), 소모사 정홍명(鄭弘溟), 조수천(曺守天) 등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곧 청주에 도착하여 적의 정세를 탐색하고 교전을 준비하였는데 진군하려 할 때 강화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의병을 해산하고 각기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근왕병으로서 여산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온 의병장들은 최계헌(崔繼憲), 홍명기(洪命基), 박춘장(朴春長) 등을 비롯하여 90여 명이었고 또한 청주에까지 진군하였다가 화의의 소식을 듣고 되돌아온 의병장들은 나해봉(羅海鳳), 박춘수(朴春秀)를 비롯한 70여 명이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까지 진격하여 시간이 갈수록 군량이 부족하고 근왕군의 내원이 없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그 절의를 지키려 했던 호남의 의병장들은 김영호(金永浩), 이덕손(李德孫), 김안방(金安訪), 정시교(鄭時喬) 등을 비롯한 37명이었다.

또한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안방준(安邦俊) 역시 그의 아들 후지(厚之), 신지(愼之)와 함께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 백인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여산에서 강화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이 외에도 해남에서 윤선도(尹善道)가 의병을 일으키려는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도내 곳곳에서의 많은 관민 활동이 있었다.

이상의 의병들은 대부분 임진년의 왜란시 거의 활동을 했던 선열들의 후예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묘호란 때에도 거의하였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가가 위난에 처하였을 때마다 타도에 앞서 호남의 선열들은 보국을 부르짖으며 거의하여 적에게 항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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