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천재화가 석현 박은용과 잃어버린 꿈

새화순신문 | 기사입력 2019/05/12 [18:13]

예술혼을 위하여-천재화가 석현 박은용과 잃어버린 꿈

새화순신문 | 입력 : 2019/05/12 [18:13]

▲     © 새화순신문

                          씨 뿌리는 여인(1982년 작)                            청옥동 풍경(1982년 작)
             
바람은 울지 않는다. 오직 바람에 스친 세상이 우는 것이다.

 

현대 미술사에서 상상키 어려운 치열한 삶을 살다가 고독한 바람으로 스러져간 천재 화가 석현 박은용을 회상하며 혼잣말로 읊조린 말이다. 지난 2008년 세상을 떠난 박은용 화가의 10주년을 맞아 광주시립미술관은 ‘검은 고독, 푸른 영혼’이라는 기획 전시로 작가의 치열한 삶과 승화된 예술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전시는 지난해 12월 4일 개막되어 오는 2월 10일까지 열린다.
 
필자가 오랜 화혼을 품은 남도의 섬 진도 출신 박은용 화가를 처음 접한 것은 1983년이었다, 경제연구소에 갓 입사하였던 어느 주말 막내 숙부님이 끄는 손길을 따라 찾아간 곳은 ‘박은용 작품 20년 전’이라는 개인전이 열리고 있던 서울 동덕미술관이었다. 당시 ‘어머니의 땅’으로 대표되는 박은용 화가 작품을 처음 만났다.

 

당시 전시 작품은 오늘날 작가의 작품 시대 구분 중 청옥동시대로 인식하는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필자의 기억에는 작품의 제목이 ‘어머니의 땅’으로 강하게 남아있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대작들이 많았으며 작품 표현기법이 당시 일반적인 동양화의 기법에서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기법이었다.  

필자는 국전 3회와 4회 연이어 입선하고 세상을 떠난 작은 아버님 춘구 이정남 화가의 유품인 다양한 화집을 어려서부터 그림책 삼아 펴들고 놀았다. 이어 선친을 따라 목포 남농 허건 선생 댁에서부터 여러 화가의 화실을 드나들며 많은 그림을 보아온 덕에 일찍부터 그림에 익숙해 있었다.
    
이와 같은 필자에게 박은용 작가의 ‘어머니의 땅’ 시리즈는 강한 인상과 함께 가슴에 담긴 이야기를 흔들었다, 이는 남도 예향의 대표적인 화가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7~1987)과 천재적인 예술혼을 안고 요절한 그의 동생 임인(林人) 허림(許林. 1917~1942) 그리고 춘구(春丘) 이정남(李正南. 1923~1958)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아픔이 담긴 이야기를 깨우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이 부분은 본 칼럼의 주제가 아니므로 추후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당시 박은용 작가의 ‘어머니의 땅’ 시리즈 작품은 익숙하게 보아왔던 여러 동양화의 기법과는 너무나 다른 표현기법으로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박은용 작가의 어머니의 땅 시리즈 작품은 근대 한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과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의 작품세계를 융합하여 새롭게 창안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이는 청전 이상범의 회화세계를 대표하는 특징적인 필법 갈필산수(渴筆山水)의 붓에 먹물을 스치듯 적시는 갈필(渴筆)과 소정 변관식의 산과 바위를 나타내는 동양 화법 태점(苔點)과 먹물의 농담에서 중도를 지향한 중묵(中墨)을 층층으로 쌓아 올려 먹빛의 깊은 울림을 토해 놓은 적묵(積墨)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박은용은 서양화의 풍경에 담긴 기법을 끌어안은 청전(靑田)의 사경 산수와 소정(小亭)이 지향하였던 우리의 산하에 담긴 정신성을 품은 사경의 맥락을 더욱 사실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박은용이 모든 것을 낳는 땅(地)이 가지는 의미를 어머니(母)라는 의식으로 끌어간 것이다.    

 

이를 더욱 엄밀하게 살펴보면 청전 이상범의 가장 원숙한 시기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산천에 담긴 풍경을 영상처럼 펼쳐놓은 평원(平遠) 적인 청전 양식의 사실성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이어 소정 변관식의 산 너머로 바라본 동양의 부감(俯瞰)적인 산수의 풍경으로 서양 화법으로 투시도법이라 할 수 있는 심원(深遠)적인 소정의 화법이 절충된 박은용의 새로운 해석이 쉽게 감지된다.
   
이는 서양화를 전공한 박은용의 천재적인 재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례이다, 작가는 화선지에 먹과 붓에 이르는 전통적인 재료를 바탕으로 우리의 그림을 추구하였던 청전과 소정의 정신을 품어 독창적인 화법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박은용의 작품 ‘어머니의 땅’ 시리즈는 한층 처절하게 우리의 땅을 파고들었다. 그의 작품들은 땅에 담긴 역사의 숨결을 매만지듯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점들은 소정(小亭) 화법의 적묵(積墨)에서 더욱더 새롭게 해석된 기법으로 역사의 숨결로 화면을 메워갔다.         

 

이와 함께 박은용의 ‘어머니의 땅’ 시리즈에서 분명하게 파악되는 기법은 청전(靑田) 화법의 가장 특징적인 갈고리 준법의 새로운 해석이다. 이는 풍화된 암석의 질감과 흙을 나타내는 준법(皴法) 중 하나인 미점준(米點皴)의 점획과 부벽준(斧劈皴)의 필선이 엉켜 들고 비켜 간 화면의 표현이 바로 청전의 갈고리 준법이다. 박은용은 이와 같은 청전 화법의 갈고리 준법을 땅이라는 표면의 표현 체로 더욱 깊은 울림으로 탄생시켰다.
  
이러한 차이는 청전(靑田)이 극히 절제된 붓질의 갈고리와 같은 표현기법으로 먹의 농담을 활용하여 피어나는 안개와 같은 고요한 느낌을 빚어내어 자연이 가지는 정적인 화면의 향토적인 정경을 담아낸 것과 의식적인 면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는 박은용이 이와 같은 화법을 재해석하여 작업을 이끌어간 기법적인 논리는 같지만, 박은용은 역사적인 의식에서 처절하게 땅거죽을 파고드는 거친 어머니의 손길 같은 표현을 추구한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특히 당시 전시작품 ‘어머니의 땅’ 시리즈 작품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의 특성이 있었다, 하나는 대작의 하단에서 무수한 점들이 엉켜 들어 망울진 점을 이루고 있는 이른바 ‘점망’(點罔) 형태의 작품들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작품 ‘일하는 여인’(1982)과 ‘청옥동 풍경’(1982)에서 살펴지는 극히 절제된 푸른빛 녹색의 표현이다.

 

필자는 당시 이와 같은 ‘어머니의 땅’ 시리즈 전시작품을 보면서 작가가 추구한 의식에 대한 강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이루어진 시대적 상황이 군부독재의 그릇된 총칼에 저항한 너무나 아픈 광주민주화운동의 함성이 분노의 울림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남도의 산야를 그려낸 작가의 작품 ‘어머니의 땅’ 전시 작품을 보면서 역사의 숨결과 민중의 눈물을 무수한 점으로 찍어간 의미와 처절하게 녹아내린 푸른빛 녹색의 빛깔에서 작가가 추구한 신성한 생명과 희망의 빛깔이 아픈 역사의 함성과 자꾸 겹쳐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였다.

 

필자는 훗날 1990년대 작가의 심신이 가장 안정되어있던 어느 날 만남에서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 저는 지난 ‘어머니의 땅’ 작품에서 선생님이 추구한 의식이 5.18과의 연관성에 대한 느낌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추구한 땅은 무엇이었습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날아든 박은용 작가의 나를 향한 눈빛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이어 작가는 못 들은 척 서울 화단은 요즘 어떻습니까? 하며 주요한 작가들을 나열하며 그들의 작품 경향을 묻고 있었다.

 

필자는 ‘어머니의 땅’ 전시 이후 몇 년이 지난 후 직장에서 자리가 잡힌 이후 전시 작품을 수소문하였다. 당시 광주는 물론 박은용 작가의 초대전시가 있었던 부산 화랑과 대전 화랑 등에 연락하여 작품 구매를 의뢰하였지만, 그 누구도 단 한 점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작가를 직접 찾아 나섰다. 당시 전남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윤애근 교수와 박은용 작가가 서라벌 예대 동문임을 파악하여 미리 약속을 하고 1990년 여름 풍향동으로 기억되는 윤애근 교수의 화실을 찾아갔다. 사다리를 타고 거대한 작품의 발레하는 무희의 손짓을 그리고 있던 윤 교수를 만나 박은용 작가를 수소문하였으나 찾지 못하여 교수님을 찾아온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어 하시는 말씀이 “선생님은 젊은분이 특이한 분이시네요!” “실성했다는 사람을 찾으려 실성하기 직전인 사람을 골라서 찾아오는 분이니 특이하다는 것입니다.” 직감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아 더는 묻지 못하였다. 이어 화실에 걸린 '보길도 아이들'이라는 큼지막하게 어린 소녀가 그려진 작품으로 화제를 바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화실을 나왔다. 이후 필자가 미술 분야에 입문하였을 때 윤애근 교수와 다시 만나 가깝게 소통하면서 당시 정황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작가를 찾아 나선 이후 그 행적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때에 화랑가에서 수소문한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가 난무하였다. 동덕미술관 전시 이후 건강이 악화하였다는 이야기에 이어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한편에선 민중 의식을 가진 작가를 누군가 밀고하여 기관에 조사를 받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어 병원에 투병 중이라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이에 부인과 이혼하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와 같은 과정에서 동덕미술관 전시 작품을 모두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필자가 훗날 파악한 사실에 의하면 작가는 동덕미술관 전시를 앞두고 이미 극심한 심신쇠약상태가 지속하고 있었다, 겨우 전시를 치른 이후 서울대 병원과 전남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사이에 주변 인물에 의하여 전시 작품 모두가 사라진 사건이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 후 1990년 7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에 사는 친구에게서 작가의 소재지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휴가를 내어 광주에 갔다. 7월 땡볕 아래 친구 두 명과 함께 찾아간 곳은 화순군 남면 사평리를 지나 사수리에 있는 두강마을 이었다. 거대한 고목이 서 있는 마을 입구를 지나 물어물어 찾아간 집 대문은 굳게 잠겨있었으며 대문에는 고추가 없는 숯덩이만 매인 금줄(禁绳)이 걸려있어 딸아이의 탄생을 알리고 있었다.

 

기척이 없이 굳게 잠긴 대문 앞에 세이레(삼칠일-三七日) 동안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표시로 걸린 금줄 앞에서 서성거릴 즈음 옆집 두암댁 할머니가 밭에서 달려와 작가의 사정이 심각함을 설명하면서 할머니 집 담을 넘어 들어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들어간 작가의 집안은 참으로 참담하였다. 할머니의 전갈에 겨우 얼굴을 내민 산모는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부어있었고 작가는 한여름 무더위에 무명베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전신을 떨고 있었다. 사모님이 서울에서 선생님을 만나러 오셨으니 일어나 보라는 전언에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난 작가는 마당으로 나와 갑자기 작대기 하나를 집어 들더니 마당에 금을 그었다. 더는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른 나뭇가지와 풀들을 여기저기서 가져와 쌓아놓고는 불을 피웠다.

 

이어 부채를 가져와 우리 일행에게 연기를 퍼부어댔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유난히도 더웠던 한여름 대낮에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염려하는 작가의 뜻밖의 지혜에 자욱한 연기를 내뿜는 모깃불 같은 불더미 앞에 우리는 소독되어야 하는 이방인이었다.

 

이후 며칠 동안 연속 작가의 집을 찾았지만, 구암댁 할머니 집에서 넘어가는 담장은 거대한 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쳐놓았으며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분유와 기저귀 등을 가져다 대문 앞에 놓고 “선생님 다녀갑니다.” 하고 외쳐놓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빼꼼히 대문을 열고 나와 일일이 검사를 마친 후 필요한 물건만 챙겨 들고는 음료와 같은 인스턴트식품은 여지없이 대문 앞 논바닥에 던져 버렸다. 
                    

▲     © 새화순신문

                                                            남도의 가을날(2007년 작)
 

이와 같은 작가와의 기막힌 첫 대면 이후 몇 군데 시내 화랑에 들러 작가의 동덕미술관 전시 작품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어느 화랑에서 연락이 왔다, 150호 작품 한 점의 소장자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보니 서울 전시 이후 그려진 작품이었다, 늦은 가을 잎을 버린 나목이 크게 서 있는 신작로에 소가 끄는 수레에 가족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귀로의 수묵 작품이었다. 이후에도 이와 같은 크기에 비슷한 구도로 수레 대신 모녀가 있는 작품을 한 점을 더 찾았다.

 

이 무렵 필자는 경제연구소를 나와 운림산방 허소치 일가의 회화사를 정리하였다. 이어 2년여 동안 무수히 일본을 오가며 천재 화가 임인 허림의 짧은 생애에 담긴 이야기를 살폈다. 이후 일본에서 돌아와 운림산방 2대 화가 미산 허형이 선친 소치의 도회로 나가 활동하라는 유언을 받들어 진도 운림산방에서 목포로 이주하기 전 강진병영에 거주하였던 배경을 살피려 병영에 내려가 보름 동안 체류하였다. 당시 박은용 화가와 연락이 되어 사모님과 함께 내려와 목포 남농기념관에 들려 임인 허림의 작품을 세세하게 살폈다. 

 

그리고 92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작가에게 직접 ‘어머니의 땅’과 같은 작품을 의뢰하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 밤 작품을 보냈다는 작가의 전화를 받았다. 보냈던 돈 만큼 그려 보냈다는 것이었다. 보내온 작품은 ‘어머니의 땅’과 같은 처절한 표현은 작품 하단부에 살짝 걸친 채로 앞에서 언급한 나목이 크게 서 있는 신작로의 수묵 작품이었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수소문하여 당시 ‘어머니의 땅’ 작품은 화선지 전지 크기의 작품을 유일하게 찾아 소장하였다. 

 

이 무렵 남도 화맥의 산실인 운림산방의 허소치 일가 4대 화가 임전이 미국으로 이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 끝에 사비를 들여 임전 허문회화관이라는 임전 작가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갤러리를 서울 충무로 한복판에 열었다. 미술계에 입문한 것이다. 이는 세계에서 유일한 일가 직계 4대에서 5대로 이어지는 화맥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단이었다. 이후 1998년 진도 운림산방에 국비 지원으로 새로운 공간이 건축되면서 4대 임전 전시실이 만들어졌다. 이에 필자는 그동안의 의식적인 활동을 마감하고 한국미술센터로 명칭을 바꾸어 부채 그림 전시와 한국화 기획에 전념하였다.

 

당시 1990년에서 199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박은용 작가의 작품은 광주 시내 곳곳의 표구점과 화랑에 가장 많은 작품이 나돌고 있었다. 당시 작품들은 예전의 산수풍경의 작품이 아닌 선이 굵은 채색화였다. 이 무렵의 작품은 작가의 특성적인 감성과 정신성이 비어버린 그림이었다. 이는 새롭게 태어난 가족은 물론 첫 부인에게서 낳은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로 인한 다작이었다. 당시 작가는 극히 불안정한 정신 상태 속에서도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않았던 가장 치열한 삶의 기간이었다.
       
필자는 오랫동안 박은용 작가를 헤아려온 입장에서 그의 회화적 구분은 1987년까지의 수묵 시대와 이후 채색 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이는 작가의 첫 부인과 이혼 이후 1984년 무렵 작가의 화실에 학교 친구를 따라갔던 인연으로 시작되어 우여곡절 끝에 박은용 작가의 치열한 삶의 동반자가 되어버린 임정숙 작가와의 인연에서부터 새로운 작업이 이루어진 배경이다.

 

이와 같은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박은용 작가가 1989년 나주 정신병원에 입원 이후 40여 일 만에 퇴원하여 1990년 큰딸 한(漢)이 탄생하여 성장하면서 광주의 표구점과 화랑가에 걸린 다작의 채색화를 거쳐 작가의 승화된 예술혼이 발아된 바탕의 작품이 박은용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 작품 모녀(母女)이다.

 

이는 1994년 무렵 두강 마을로 새롭게 거처를 옮겨 작가 스스로 흙벽돌을 찍어 화실을 지었던 시기에 한 여름 일터에서 돌아온 아내가 딸과 함께 목욕하는 장면을 그려낸 ‘모녀’(母女) 작품은 작가 박은용을 존재하게 하는 현실과 예술의 정신적인 바탕이었다. 초기의 ‘모녀’(母女) 작품의 명제는 ‘여름날’이었다. 이후 ‘여름날’과 ‘모녀’(母女)로 병행하다가 다양한 제목으로 그려진 작품은 작가의 회화적 흐름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초기 모녀의 작품은 짙은 먹빛의 배경 속에서 모녀의 모습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후 차츰 밝아진 배경의 색감이 살아나면서 따뜻하고 평온한 화면을 이루었다. 이어 화사함까지 느껴지는 한층 밝은 색조의 배경과 함께 과일과 꽃이 등장하면서 여인의 방향이 다양하게 그려졌다.

 

이러한 ‘모녀’(母女) 작품을 바탕으로 변모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시골의 일상을 소재로 하는 향토적이며 서정적인 감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이와 같은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는 귀로와 기다림이었지만 시골 장터의 풍경에서부터 시골 생활의 다양한 일상을 향토적인 감성으로 매만져갔다. 이는 작가의 내면적 의식을 살피게 하는 대목으로 작가는 우리의 땅에서 살아가는 꾸밈도 거짓도 없는 시골 서민의 삶을 꾸밈없이 그려내는 작업에 모든 열정을 퍼부었다.

 

이는 전기 수묵 시대의 청전(靑田)의 갈필산수(渴筆山水)의 갈필(渴筆)과 소정(小亭)의 적묵(積墨)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안한 박은용 양식의 적묵(積墨)의 점묘법(點描法)을 통한 수묵화 시대의 맥락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이와 같은 작가의 후기 채색화 시대의 작품에 내재한 의식과 감성은 바로 국민화가 박수근(朴壽根. 1914~1965)과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을 깊게 헤아린 의식이 분명하게 감지되는 까닭이다. 박수근은 극히 단순화시킨 선을 통한 조형을 바탕으로 중첩된 붓질을 통한 화강암의 질감과 같은 화면 속에 서민의 삶에 담긴 향토적인 감성을 토해놓은 대표적인 국민화가이다. 이어 이중섭은 소와 닭 그리고 어린이와 가족을 소재로 동화적인 감성을 향토적인 이야기로 담아내며 지독한 가난으로 인한 가족과의 이별을 예술혼으로 그리워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화가이다.
 
박은용의 후기 채색화 작품을 이루는 향토적인 서정의 감성은 이와 같은 박수근과 이중섭의 예술에 담긴 의식을 관통한 맥락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특히 작가의 수평적인 한 줄로 늘어선 구도로 이루어진 일련의 작품들은 박수근의 수평적 구도의 작품들과 그 맥락이 맞닿아있다.

 

필자는 2008년 9월 독일에서 전시 중이던 어느 날 광주일보 문화부 오광록 기자로 부터 작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몇 년 후 1990년 7월 화순군 남면 사수리로 맨 처음 박은용 작가를 찾아갔을 때 갓 태어났던 딸아이로 작가의 모녀(母女)작품에 주인공이었던 딸이 결혼 일자를 받아놓고 세상을 떠났다는 실로 충격적인 너무나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     © 새화순신문

                                          모녀(1998년 작)    무더운 여름날(2006년 작)        박은용 작가

윤애근 교수가 생전에 필자에게 한 말이다. “그 애(임정숙)는 내가 가장 아끼던 제자였어요!” (더 이상의 이야기는 줄인다) 그 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윤애근 교수는 18세의 나이로 ‘삼밭’이라는 작품으로 당시 하늘에 별과 같았던 국전에 첫 출품 특선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이에 세간의 큰 화제를 뿌리며 당시 화단에 촉망받는 여류작가로 등장하였으나 자신의 푸른 꿈을 접은 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전남대 교수로 정착하였다. 이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던 그에게 이루지 못한 꿈을 키울 수 있는 재능이 눈에 띄는 제자가 나타났다. 이에 깊은 마음을 쏟았으나 어느 날 그 제자를 앗아간 장본인이 바로 박은용 작가였다는 것이다.

 

박은용의 예술세계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배경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음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천만 근 쇳덩이 같은 무게로 짓누르는 가난이라는 현실의 멍에 속에서 일생을 정상과 실성의 경계를 오가는 작가의 배우자가 되어 꽃다운 청춘과 모든 삶을 바쳐 예술가의 아내로 친구로 그리고 동지로 동행한 여인(임정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박은용의 예술세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었는지 깊게 생각해 볼 내용이다.

 

그는 작가의 아내가 되어 함께 들판에서 장터에서 스케치하는 때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되었을 때부터 생활이라는 치열한 멍에를 짊어진 아낙이 되어 작가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아니 떠난 이후에도 고단한 삶의 멍에를 걸머져야만 했다. 꿈 많은 미술 교사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바람과 같은 천재적인 예술가의 아내가 되어 정작 본인은 단 한 점의 그림도 그려볼 수 없었다. 이처럼 치열한 삶에 부대끼며 살아온 여인의 잃어버린 꿈은 고독한 예술가의 그늘에 가려 흔적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아끼는 예향의 도시 광주라면 이와 같은 잃어버린 꿈에 대한 아픔도 헤아리고 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몇 가지 자료를 확인하려 연결한 통화에서 필자의 물음에 “그림 그리고는 싶지요! 그렇지만!” 말끝을 뭉개는 음성에 담긴 현실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른다. 

 

천재 화가 석현 박은용! 그가 남긴 뜨거운 예술혼이 녹아내린 작품 앞에서 우리는 시대를 관통한 예술가의 처절한 삶의 흔적을 매만지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와 함께 단 한 번도 펴지 못한 스케치북의 그림처럼 잃어버린 꿈을 안고 홀로 남은 비련의 여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일도 우리의 몫일 것이다.     

 

바람은 울지 않는다. 오직 바람에 스친 세상이 우는 것이다.                     글/ 이일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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